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 (문단 편집) ==== [[토틸라]]의 등장 ==== 라벤나 함락과 비티게스의 체포 이후에도 티키움(파도바)과 베로나는 동고트 족의 수중에 남아있었고, 장군 우라이아스의 제안으로 [[헬데바두스]]가 새로운 왕으로 추대되었다. 벨리사리우스가 이탈리아를 떠난 이후 동로마 주둔군의 지휘 계통은 분산되어 있었는데, 이는 동고트 족에게 소생의 기회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역병의 창궐로 인해 동로마 정부의 재정이 악화되면서 군인들의 급료가 밀리자, 이탈리아의 주둔군은 토착민에 대한 약탈을 자행하여 민심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힐데바두스의 동고트 군대는 손쉽게 리구리아와 [[베네치아]] 일대를 회복하였고, 베네치아 인근의 트레비소에서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며 순식간에 포 강 이북의 대부분을 평정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공로에도 불구하고 헬데바두스는 충성스러운 장군 우라이아스를 그의 부인이 왕비와 다투었다는 사소한 이유로 처형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힐데바두스의 지지도는 급락하였고, 그 역시 541년 5월에 암살되었다. 이후 동고트 왕국에 복속되었던 [[오도아케르]]의 잔존 세력인 루기아 족이 내세운 [[에라리크]]가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는 고트족 귀족들을 설득하여 동로마 제국과 협상을 주장하였는데, 실상은 그에 항복하려는 것이었다. 541년 가을,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의 밀서가 폭로되자, 고트 귀족들은 전 왕인 일디바드의 조카 [[토틸라]]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에라리크는 곧 살해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토틸라 역시 동로마 측과 협상을 지지하던 '주화론자'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즉위 후에는 호전적인 모습으로 돌변하였고, 대반격의 선봉장이 되었다. 에라리크에 호의적이던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토틸라의 즉위를 찬탈로 규정하였고 541년 말, 콘스탄티누스와 알렉산드로스가 이끄는 군대를 북상시켜 베로나를 포위하게 하였다. 동로마 군대의 특공대 백 명은 성안 내통자 마르키아누스의 도움으로 밤중에 성문 중 하나를 점령하였으나 성 밖의 두 장군은 약탈품의 분배를 놓고 밤새 실랑이를 벌이며 입성을 지연하였다. 다툼이 지속되는 동안 고트족 수비대는 성문을 회복한 후 반격하였고, 동로마 군은 패배하여 무질서하게 후퇴하였다. 성문에 있던 특공대는 지면으로 뛰어내렸는데, 그러다 추락사 하기도 하였다. 토틸라는 동로마 군대의 기강을 보고 5천의 기병을 이끌고 과감히 추격에 나섰다. 동고트 군대는 포 강을 넘어 라벤나 인근의 파벤티아에서 전투를 치렀는데 수적으로 불리하였음에도 동로마 군대를 격파하였다. 본격적인 전투에 앞서 양측이 대치하던 상황에서 동고트 진영의 거인 용사 발라라스가 일대일의 일기토를 신청하였는데, 동로마 장병들은 겁을 먹고 떨고만 있었다. 그때, 베로나에서의 백인 특공대의 리더였던 장교 아르메니아인 '아르타바제스'가 나섰는데, 혈투 끝에 상대를 죽였지만 본인도 치명상을 입었고 3일 후에 사망하였다. 승리 이후 토틸라는 토스카나로 진격, 피렌체를 포위하였고 공성전에 대비하지 못하고 있던 장군 유스티누스는 다른 장군들(요한네스, 베사스, 키프리아누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세 장군은 군대를 합쳐 피렌체로 진군하였는데, 수적 열세를 본 토탈라는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후퇴하였다. 로마 군대는 요한네스 군을 선두로 하여 추격하였는데, 토틸라는 언덕 위에 이르자마자 말머리를 돌려 추격해온 동로마 군을 맞받아쳤다. 요한네스의 군대는 비교적 침착히 버텨내었으나 진중에 그가 전사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기를 잃고 흩어져 버렸다. 선두의 군대가 패배한 것을 본 베사스와 키프리아누스의 군대 역시 뿔뿔이 흩어져 버리며 토틸라는 동로마 주력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무켈리움 전투, 542년) 패배 이후 세 장군은 분산하여 요한네스는 로마시, 베사스는 [[스폴레토]], 키프리아누스는 [[페루자]]에 틀어박혀 농성하게 되었다. 유스티누스 역시 추격에 참가하였다가 패배 이후 다시 피렌체로 복귀하여 545년까지 주둔하였다. 한편, 토틸라는 단 한번의 패배로도 괴멸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여 동로마 군대가 모여있는 중부 지방을 지나 상대적으로 방어가 취약한 남부 이탈리아로 향하였다. 로마시를 유유히 지나친 동고트 군대는 손쉽게 [[베네벤툼]]을 점령하였고 루카니아,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등지를 복속시켰다. 남부 대부분을 평정한 토틸라는 중남부의 동로마 거점인 [[나폴리]]를 포위하였다. 포위된 나폴리를 구원하라는 특명을 받은 시칠리아의 신임 군사령관 데메트리오스는 대함대를 이끌고 출항하였으나 동고트 함대에게 대패하여 후퇴하였다. 데메트리오스는 그에 굴하지 않고 다시 구원 함대를 파견하였으나 폭풍을 만나 배가 좌초하였고 동고트 군대의 습격으로 큰 피해를 입어 결국 후퇴하였다. 포위가 지속되자 성 내부의 식량 사정과 민심이 바닥을 쳤다. 이를 눈치챈 토틸라는 수비대장 칼론에게 항복한다면 수비대 전원의 안위 보장을 약속한다는 관대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543년 봄, 칼론이 이를 받아들이며 1천의 동로마 수비대는 항복하였고, 성벽은 허물어졌다. 적은 군대를 지녔던 토틸라는 자신이 점령한 도시가 다시 반기를 들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경우 시벽을 허물었다. 다만 로마시의 경우 성벽을 1/3정도 군데군데 끊어 성벽의 기능을 못하게 하는 데에 그쳤다. 토틸라는 점령지와 포로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고, 몇몇의 포로들은 그의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기도 할 정도였다. 나폴리 입성 이후에 그는 굶주린 시민들을 위해 식량을 무상으로 제공하였고, 동로마 포로들 중 부상자를 치료해 주었으며, 포로들의 향후 행선지도 그들 자유에 맡기며 간섭하지 않았다. 이후 역사가들은 토틸라의 상당한 '인간성'에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543년 3월 21일, [[몬테 카시노]]의 [[성 베네딕투스]]가 토틸라를 만나 이탈리아의 평화를 부탁하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